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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전동아논설위원, 산베고 누운 구름 아침단상] >눈 어두운 이들에 빛을, 고(고) 정광진! -육신의 눈은 캄캄했으나 밝고 맑은 마음의 딸... 유지(유지) 이어! 28년 전, 삼풍 붕괴 참사 당시 세 딸을 잃었다.

운영자 | 기사입력 2023/05/30 [07:36]

[최영훈 전동아논설위원, 산베고 누운 구름 아침단상] >눈 어두운 이들에 빛을, 고(고) 정광진! -육신의 눈은 캄캄했으나 밝고 맑은 마음의 딸... 유지(유지) 이어! 28년 전, 삼풍 붕괴 참사 당시 세 딸을 잃었다.

운영자 | 입력 : 2023/05/30 [07:36]

 

산베고 누운 구름 

 

>눈 어두운 이들에 빛을, 고(고) 정광진! 

-육신의 눈은 캄캄했으나 밝고 맑은 마음의 딸... 유지(유지) 이어! 

28년 전, 삼풍 붕괴 참사 당시 세 딸을 잃었다. 

그는 딸들을 한꺼번에 잃고 삶의 막장을 봤다. 

눈 안 보이는 큰 딸 치료비 탓에 법복 벗었다. 

그런데 세딸이 한날 한시에 저 하늘 별이었다. 

그런 고인마저 19일 별로 올랐다. 향년 85세. 

 

서울법대 졸업 후 1963년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3년간, 고법 판사까지 하다가 그는 옷을 벗었다. 

눈이 안 보이는 윤민(당시 29세) 치료비 데려고... 

그렇게 1978년 법복을 벗고, 변호사로 변신했다. 

큰 딸은 가족의 소망과 염원에도 시력을 못 찾는다. 

 

그러나 향학 투혼으로 1988년 과감하게 미국에 갔다. 

명문 버클리 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는 쾌거를 이뤘다. 

윤민은 동병상련의 시각장애인과 함께 하려 늘 애썼다.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서울맹학교 교사가 된다. 

 

하늘을 참으로 원망해야만 할까? 

윤민은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때 숨을 거둔다. 

왜, 하늘은 선한 사람들을 먼저 데려가곤 할까? 

어이없게도 둘째 셋째 윤정 윤경도 함께 변을 당했다. 

고인은 보상금(7억원)과 개인 돈을 보태 ‘삼윤장학재단’을 만들었다. 

 

큰 딸 모교요 첫 직장이기도 한 서울맹학교 재단에 거금을 넣었던 거다. 

눈 안 보이는 딸을 위해 45년 전 변호사가 돼 착한 삶을 살았건만은... 

큰 딸 윤민은 5살 때 한쪽 눈을 잃은데 이어 12살 때 양쪽 다 실명했다. 

그 딸은 시력을 끝내 되찾진 못했다. 

 

하지만 1988년 미국 버클리대 유학길에 올라 향학의 투혼을 발휘했다. 

기어코 석사를 마치고, 돌아와 같은 처지의 이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세 딸, 윤민 윤정 윤경은 생필품을 사러 거기에 갔다가 참변을 당했다. 

큰 딸이 눈 안보이는 이들을 위하겠다며 교사된지 불과 9개월째였다. 

세 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고인은 변호사 생활을 중단할까 고민했다. 

 

고인은 도저히 참기 어려운 고통을 이겨내고 승화시키는 결단을 한다. 

보상금 7억원과 개인 돈을 보태 장학재단을 만드는데 힘을 쏟은 거다. 

그 장학재단,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했건만은...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 언론에 그 뭉클한 사실을 알렸다. 

 

고인과 가까운 사이 법조인들 상당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재단 설립 당시 소식을 접한 YS도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정광윤 변호사가 베푼 고귀한 사랑은 세 딸의 못다한 꿈을 이루는 일일뿐 아니라 앞 못보는 어린 학생들에게 어둠을 밝혀주는 '희망의 빛'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장학재단 이름 ‘삼윤’은 세 딸들 이름에서 따와 지었다. 

“맹인들에게 빛이 되려던 딸을 대신하려...”(모친)라고 했다. 

유족 부인 이정희씨, 외손자 윤상원 등이 있다. 

 

빈소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호실에 뒀다. 

발인 22일 오전 7시30분, 장지 용인평온의숲 시안공원. 

고인과 크게 연은 없지만, 조문을 꼭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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