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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신의 민초들의 의황 인산 김일훈 선생 그는 누구인가

박인주 | 기사입력 2021/03/20 [14:01]

불세출의 신의 민초들의 의황 인산 김일훈 선생 그는 누구인가

박인주 | 입력 : 2021/03/20 [14:01]

 

<신약본초>의 주인공 인산 김일훈, 그는 누구인가?(1)

 

인산 100년

 인류 의학사상 유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독창적 인술을 활용해 병고로 신음하는 각종 암, 난치병 환자들을 구료하고 참의료의 대도를 밝혀 세인들로 부터 불세출의 신의, 민초들의 의황 등으로 불리며 존경받았던 선각자 일제 치하에는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기에 앞서 한 목숨 초개처럼 여기며 오로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친 독립투사.

 

광복이후에는 집안 살림을 돌보는 대신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독특한 의방을 활용해 아무런 조건이나 댓가 없이 암, 난치병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전념한 까닭에 세상에선 민초들의 의황으로 통했지만 정작 자신은 팔십 평생 가난과 천대속에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했던 비운의 참 의료인.

 

돈과, 권력, 지식을 내세우는 오만불손한 환자들에게는 예외 없이 준엄한 꾸지람을 통해 삶의 바른 길을 자각하도록 인도한 반면 가난하고 순박한 병자들에게는 한없이 가슴아파하며 온 정성을 다해 치료에 임했던 인술의 아버지. 그의 이름은 인산 김일훈이다.

 

운룡 세상에 나오다

 떄는 1909년, 조선 순종 3년, 음력 3월 25일, 함경남도 홍원군 용운면의 유의 집안에서 훗날 묘향산 활불, 지리산 도사. 불세출의 신의, 민초들의 의황 등으로 불리게 될 아이가 태어난다. 바로 인산 김일훈 선생이다. 선생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는 모두 유학자이자 의학자였다. 아이 때의 이름은 운룡이다. 선생께서 세상에 나오기 전,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꿈에 신룡이 날아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운룡은 주로 평북 의주에서 어린시절을 지냈다. 아버지가 그곳의 글방 훈장으로 초빙되어 살았기 때문이다. 운룡은 네 살 무렵, 누나가 할아버지로부터 한글을 배우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스스로 한글의 원리를 깨달은 뒤, 이어 옥편을 모두 외웠고 <춘향전>의 한글본과 한문본을 읽었으며 <명사십리> <충렬전> <삼국지> <당시> <두시> <강희자전> 등을 차례로 독파했다.

 

일곱 살 때 우주의 비밀을 깨치다

일곱 살 때인 1915년 여름 어느 날, 운룡은 우연히 비 개인 하늘의 오색 무지개를 보다가 홀연 우주와 신약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 우주 공간의 뭇 별들이 어떤 특성을 지녔으며, 그 성질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식물, 동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왜 사람은 병들고 늙어서 죽어 가게 되는지 등의 이치와 실상이 확연하게 소년의 눈에 파악되고 감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덟 살 때의 일이다. 어떤 사람이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환자를 업고 할아버지에게 왔다. 할아버지는 당시 존경받았던 유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마침 할아버지을 찾아왔던 한 스님이 독사에 물렸을 때는 독사을 잡아먹는 고양이가 약이 되니, 그걸 삶아 먹이도록 합시다하고 제안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소년 운룡은 지금은 독사의 독이 온몸에 퍼진 상태여서 고양이로는 저 사람을 살리는 것이 불가능하고 부엌의 마른명태 다섯 마리를 한꺼번에 푹 고아서 국물을 떠먹여야 살릴 수 있다하고 소견을 제시하였다.

 

 할아버지는 환자의 상태가 위급하고 다른 묘안이 떠오르지 않자 손자의 말대로 해보기로 했다. 과년, 푹 삶은 마른명태의 국물을 먹였드니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기적처럼 환자가 살아났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 운룡의 할아버지도 깜작 놀랐다. 독사에 물린 사람에게 마른명태가 약이 된다는 걸 네가 어찌 알았느냐고 할어버지가 묻자 운룡은 전해 예상치 못한 뜻밖의 대답으로 주위를 더욱 놀라게 하였다.

 

 명태, 즉 북어는 천상의 28수 중 북방의 일곱 별 가운데 물의 기운이 강한 여성의 정기를 받아서 태어나고 자라기 때문에 몸 안에 수정수기가 강하다. 독사의 독은 화독이므로 심한 화독으로 생명이 위태로울 때에는 수기가 극강한 북어가 화상의 해독약이 된다.

 

독립운동가 인산 김일훈

열여섯 살 되던 1924년 가을, 운룡은 조선 소녀를 희롱하며 못된 짓을 일삼는 일본인 소년 열다섯 명을, 네 명의 친구들과 합세하여 때려눕힌 뒤 압록강을 건너 간도로 들어가 곧바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변창호 선생이 대장으로 있던 모화산 부대의 지을룡장군으로 항일전투에 참가하는 등 무장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했다.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면서 동침으로 병자들을 구제했고, 때때로 항일 전투에 나가곤 했다. 1934년 봄 어느 날 철원경찰서 습격작전에 참여한 뒤 금강산에 있던 변창호 대장의 지령을 받아 다시 철원으로 가던 중 금화군 금성면에서 조선인 일본 형사 이희룡에게 붙잡혀 손톱, 발톱이 빠지는 모진 고문을 당한 뒤 3년 형을 선고받고 춘천형무소에 갇혔다.

 

 형무소에서 복역한지 1년 6개월이 되었을 무렵, 노역을 하던 중 탈출하여 백두산, 묘향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막노동, 사금 채취, 채약 등으로 연명하면서 자연물의 약리 작용을 연구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인술을 펴 죽어가는 숱한 병자들을 구제하였다. 집안에 전승되어오던 약소금 제조법을 개선하여 최초로 죽염을 만들어 진폐증에 걸려 죽어가던 한 광부를 살려낸 것도 이 무렵이다.

 

도피생활 중 방한암, 송만공, 김수월 등 당대의 선지식들과 만나 도를 논하기도 했으며, 1942년에는 김두운 선생이 주도한 조선총독부 습격 계획에 참여헸다가 주도자의 체포로 무산되자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설령암과 강선암에 은거헸다. 이듬헤인 1943년 평안북도 구성군 천마면 인동후인 장인학선생의 여식 영옥과 정혼을 한 뒤 광복 이후 혼인하게 된다.

 

 묘향산에 은거할 때 뛰어난 인술과 자비심으로 활인구세의 이적을 보인 것에 감명 받은 임시정부 독립신문 사장 겸 주필 김승학 선생, 평북의 거유 충재김두운 선생 등이 운룡에게 인산이라는 호를 붙여주었다. 인산은 광복이후에 이름을 운룡에서 일훈으로 스스로 개명하였다. 

 

광복이 되자 선생은 묘향산 영덕사에서 하산, 서울로 가서 송운방주혁 선생과 김규식 박사의 집에 머물면서 송진우, 김성수, 김범부, 정인보, 장덕수, 김준연, 조병옥, 여운형, 김병로 등과 만나 국사를 논의했다.

정부수립 직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 전통의학과 서양의학의 장점을 살린 양한방 종합병원과 양한방 종합의과대학의 설립을 제안하였으나 염소나 소가 뜯어먹는 풀뿌리, 나무껍질을 달여 먹이고 쇠꼬챙이(침)로 사람을 찌르는 야만적 행위가 무슨 의학이냐 무지와 편견의 억지논리를 펴는 보건의료 담당 미국 고문관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정계 지도자들을 차례로 만나 빛나는 조국건설의 비전 을  세우고자 했으나 좌우대립의 정치현실과 그들이 보여준 불미스러운 모습에 실망하여 정계와 결별하고 계룡산으로 내려가 글방 훈장과 목수일, 산판 일, 등으로 생계를 이으면서 공간 색소중의 산삼분자를 합성한 영약 오핵단 을 제조, 실험한다.

 

그 후 인산선생의 셋째며느리 인산한의원 최은아 한의학박사가 미라클캡슐을 만들어 선생의 거악생신 활인구세 인애사상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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