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베고 누운 구름
>신명의 꽃, 문화계 거인 이어령 추모!
2022년 2월 26일.
천재 이어령 선생은 향년 88세로 눈을 감았다. 그 직전, 고인을 가까이서 본 작가 김지수의 회고. "나를 불러 가만히 눈을 감고 말씀하셨어요. ‘글로 써주게. 사람들에게. 너무 아름다웠다고. 정말 고마웠다고’ 그랬던 이어령 선생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오의 햇살을 맞으며 죽음과 따뜻하게 포옹했습니다.” 이어령의 마지막 시간들을 인터뷰로 소개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의 저자 김지수가 한 말이다.
용인시는 26일 기흥도서관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작가를 초청해 특강을 했다. 김지수는 이어령을 ‘벼락처럼 내려진 선물’이라 했다. “선생은 죽음을 탄생과 연결해 내 생명이 어디로 가는지를 쉽고 깊은 언어로 이해하신 시대의 석학이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가장 밝고 희망적이며 명쾌한 삶의 이야기로 증명했다”고도 했다. 고인의 가르침은 독자들이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하고 탐험하되 자신만의 무늬로 나답게 살고, 나답게 존재하고, 나만의 이야기를 쓰는 ‘단독자’가 되라는 거라 했다. 이상일 시장도 강연을 듣고 두차례 다섯개나 질문했다. “죽음을 스스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 삶의 마지막 갈증을 푸는 것이라고 했던 이어령 선생이 생을 마감할 때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했다고 하는 데 육필로 글은 언제까지 썼는지, 마지막이 어떠했는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김지수는 “몸이 많이 야위었지만 정작 말을 시작하면 말이 산소가 돼서 몸을 휘젓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몸이 거대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도 출판사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시집의 서문을 입으로 읽어줬다. 지치지 않는 열정이었다"고 답했다.
나도 고인이 창공의 별이 되기 두달 전 자택에서 숨이 꺼져가면서도 불타는 그의 열정을 지켜봤다. 코로나 팬데믹의 창궐 중 그는 30분 면담 시간을 한시간 반 가깝게 이어가면서 팬데믹이 인류에게 미칠 영향에 관해 열변을 토했다. 링거를 맞으며, 마른 몸을 반쯤 소파에 뉜 채 말을 이어가는데 눈물이 글썽했다. 홍신자 선생이 인편으로 '신명의 꽃으로 돌아오소서'(21세기 북스)라는 이어령 추모집을 보내주는 바람에 글을 엮는다. 먼저 고인을 장형 김봉규와 함께 평생의 사표요 은인으로 여긴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기고부터...
#1, 그립습니다 - 이어령(1934∼2022)
벌써 이어령 선생이 우리를 남겨두고 떠나신 지 한 해가 됐다. 오색으로 물들었던 형형색색의 단풍도, 찬연한 겨울 하늘을 타고 내려와 쌓였던 보현봉의 흰 눈도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쳤던 시간이었다. 가슴이 뻥 뚫려서인지 시각의 그물망에도 걸리지 않고 통과해버린 탓이다. 선생과 쌓은 짧지 않은 인연으로 감아뒀던 기억의 실타래에서 풀어낼 이야깃거리가 어디 한둘일까마는 이마저도 선생과 상의할 수 없기에 그저 조심스럽기만 하다.
문득 30년 전의 일이 기억난다. 문화부(현 문화체육관광부)가 신설되고 초대 장관으로 부임하신 선생께서 이듬해 어느 날 필자를 급히 찾으셨다. 그곳에는 이승열 당시 국립국악원장도 배석해 있었다. 문화부 산하 국립국악원이 그해 개원 40년을 맞는데 이를 기념한 개원 ‘40년사’를 발간했으면 하셨다. 평소 누구보다도 문화를 사랑하고 역사적 사실의 기록에 앞장섰던 선생다운 말씀이었다. 그런데 문화부가 신설 조직이라 예산이 넉넉지 않아 이 중요한 문화사적 의미를 담아내기가 쉽지 않다고 읊조리듯 탄식하셨다. 이는 국악이라고 하는 문화의 한 영역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 또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얹힌 묵직한 말씀으로 필자에게도 들려왔다.
그러면서 힐끔 필자의 표정을 살피시는 듯했다. 그렇게 몇 초, 다시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더니 선생에게서 평소 발견하기 쉽지 않던 부드러운 음성으로 삼성출판사가 도와주기를 넌지시 요청하셨다. 학자의 당당함과 관료로서의 권위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표정의 선생과 필자의 눈이 간격의 정중앙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그 찰나가, 무조건 지원하겠다는 다짐의 계약서에 날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하여 ‘국립국악원 40년사’는 삼성출판사의 후원으로 발행할 수 있었다.
선생은 자존심이 대단히 강한 분이셨다. 선생을 가까이에서 보아 온 분이라면 다들 느꼈을 것이다. 아무리 필자를 미덥게 여기셨다고 하더라도 청탁하거나 신세 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선생의 성품으로 볼 때 절대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선생의 이 쉽지 않은 건의가 계기가 되어 국립국악원의 중요한 역사에 작게나마 삼성출판사가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필자에게도 큰 보람이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새삼 선생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렇듯 선생은 장관으로 봉직할 때나 그 직책을 내려놓은 후에도, 문화부에 관해서는 유독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앞장서주셨다. 문화부를 통한 선생의 이러한 문화 견인자 역할과 실천적 사례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30년이 지나 2021년 어느 날 행사차 국립국악원을 방문했을 때 국악박물관 자료실에서 국악원 자료 담당 직원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직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40년사’를 꺼내오더니 당시 삼성출판사의 전적인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잠시 30년 전의 기억을 소환해주었다. 아울러 올해가 벌써 국악원이 문을 연 지 70년이 되었다며 이 역사를 담아 ‘70년사’를 발간했는데, ‘40년사’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선생의 문화 사랑 실천에서 비롯된 뜻깊은 회고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와의 이별이 있기 한 해 전이었기에 흐뭇했던 기억보다는 그리움이 밀려들어 허전함만이 앞서는 듯하다.
당시 고마움의 표시로 이승열 원장이 넌지시 건네준 멋진 ‘고장 북(소리북)’은 지금까지도 필자의 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다. 흥부가 박 타는 대목에 맞춰 덩달아 바빠지는 고수의 ‘소리’ 장단처럼 흥겹고도 쩌렁쩌렁했던 선생의 강연을 다시 한 번 듣고 싶어 초점 잃은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보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심히 서 있는 문수봉의 바위 허리뿐. 다시 옷깃 안으로 쓸쓸함이 밀려든다.
#2, 신명의 꽃으로 돌아오소서 -이배용 외 71인이 글을 보내 책에 실렸다. 대체로 인연이 있는 사람들 글만 발췌했다.
1, 이배용
책 서문이다. ...이어령은 한 시대를 깨운 지성이었으며 한국 문화예술의 혼불을 밝혔다. 선생님의 한 생애는 우리나라 문화가 근대에서 현대로 탈바꿈해 K-컬처가 인류에게 새로운 로망이...
선생은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통해 루스 베네딕트를 능가하는 일본 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으로 일본 열도를 경탄케 했다.
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를 설립해 미래의 동북아 문화공동체를 초석을 놓은 바 있다. 한중일 공유 문화 탐색이나 한중일 공용 한자 808자 제정 등 프로젝트는 기념비였다. 학문의 동과 서에 대한 통섭으로 나아가 금후의 디지털 문명을 예견한 '디지로그 시대'를 선언했다.
자크 아탈리에 앞서 미래의 생태적 공동체를 위한 '생명자본주의'를 주창하여 세계 문화에 대한 선견을 제시했다.
작가로 교육자로 언론인으로 문화 비평가로 문화부 장관으로 선생의 눈빛과 생각이 닿는 곳은 어김없이 창조와 변화의 산과 강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우리의 현대 문화와 더불어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전통 문화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2,고건
이어령과 관선 서울시장 때 처음 만났다.
노원구에 창의적인 쌈지공원을 만들 때다.
'시에서 버려둔 자투리 땅을 찾아 그곳에 쌈지마당의 문화 공간을 세우는 안을 발표했다...
그 공원을 만든 뒤 자진해서 고선 시장의 '가게무샤(대역)'가 된 것이다...
신설 문화부와 서울시는 동행자로서 손을 잡고 갔다. 고질적인 공무원들의 텃밭 싸움의 벽이 허물어진 것이다.'
그는(이어령) '가게무샤'라는 표현을 썼지만 나는 항상 서울 문화 시정의 동반자요, 시장의 멘토로 생각했다.
민선 시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동행자의 관계는 더욱 날개를 달았다.
도시 계획이나 건설 사업에 문화의 옷을 입히려는 나는 그에게 개발 위원장의 자리를 맡기게 된다.
그 중에서도 남산 복원과 쓰레기 더미로 변한 난지도 개발사업 마스터 플랜의 중요 정책을 부시장단과 함께 하주도하게 했다.
이에 대한 이어령 선생의 글을 다시 그대로 옮긴다.
'왜 나는 중이염을 앓는 귀를 틀어막으면서까지 헬리콥터에 동승해 찬 강바람을 맞아야 했는가. 왜 월드컵 경기장의 발주자 설명회에 나가 격에도 어울리지 않는 프레지젠테이션을 해야만 했는가. 물론 공해의 상징인 난지도를 하늘 공원으로 만들어 자연 생태계를 복원하는 에코시티, 산업 시대의 폐기장을 정보 시대의 꿈을 창조하는 '디지털 미디어시티' 모두가 내 마음을 두근그리게 하는 일들이었다.'
3, 김병종
'이어령의 마지막 1년은 어떤 면에서 그의 전 생애를 견인할 만큼의 무게를 지닌 것이었다.'
김병종은 그에 대한 추모의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그가 보낸 지상의 시간 대부분이 문명과 생명, 그리고 시대에 대한 번뜩이는 레토릭으로 일관된 것이었던 데 반해 마지막 1년은 비언어적 서사를 보인 '몸'의 시간이었다...
그가 한사코 일체의 항암 치료나 투약을 피하려 했던 것도 맑은 정신 속에서 끝까지 진화해가는 자기의 죽음을 바라보고 싶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언젠가 이어령이 내게 들려준 얘기 한 토막.
"세상에서는 내가 딸의 희생을 놓고 신(신)과 '딜(deal)'을 벌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삶과 죽음의 문제가 피할 수 없는 주제로 내게 다가온 것은 전혀 다른 각도와 방향에서였어요.
오래 전 연구년으로 일본의 한 소도시에서 머물던 시절, 편의점 불빛만이 새어나오는 깜깜한 벌판의 교차로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어요.
하늘엔 별이 총총했는데 우주에 홀로 내팽개쳐진 느낌이었고 간절하게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었죠.
그때 얼핏 내 앞으로 지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만진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날 밤의 그 형언할 수 없고 압도적인 느낌을 묻어두고 있었는데, 훗날 환희 웃으며 죽음을 맞아들이는 딸을 보고 문득 그것은 더는 피해갈 수 없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 면에서 내 딸은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내 앞에서 등을 밝힌 맑은 선지식 같은 존재였던 셈입니다. 나는 영적(영적) 지진아였고."
4, 신달자
시인이 쓴 추모글의 제목은 '선생님 선생님 이어령 선생님'이다.
느리게 빠르게
빠르게 느리게...
걷고 걷고 걷고
뛰고 뛰고 뛰고
나르고 나르고 나르고
자신 안에서 몇백 번 죽고 살아나고 살아나고 죽고
뇌며 손이며 가슴이며 입이며
너무나 할 일이 많아
몇백 년이 지나도록 할 일이 많아
천만 평의 말씀 곡식을 전 세계에 뿌리시고도
마음 고픔이여...
선생님 아 이어령 선생님
500년은 아니 천 년은 살다 가신 선생님
선생님께는 '마지막'이 없습니다.
1초도 그 1초의 마지막도 처음처럼 바라보시던
그 눈이여!
남아 있는 어리석은 애틋함 때문인가
그 너머 세계를 바라보시며 그쪽으로 가셨는가
어리석은 애틋함이 염려되어 이쪽으로 방향을 돌리시는가
그 저릿하고 아릿한 시선
지금은 어디를 보고 계시는지요...
5, 신현웅
웅진재단 이사장인 그는 이어령 장관 재직 때 차관을 지냈다.
'이어령의 눈물 한 방울 한강 되어 흐른다'가 제목이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이라며 원래 있던 모태(모태)로의 귀환"이라고 말씀하셨듯이 이제 천국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아버님, 따님 민아와 지난 날 이야기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1990년 초대 문화부 장관 취임식에서 이 장관은 "황야의 집을 지으러 온 목수다. 목수는 자기가 지은 집에서 살지 않는다"는 일성으로 문화부 관리들을 하루 아침에 목공으로 만들었다.
문화동산 메마른 바위에 이끼를 입히고 우물터에 두레박 하나 놓으시고 떠나시면서 흘린 고인의 눈물 한 방울이 한강이 되어 태평양에 큰 문화 한류가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국립국어원 신설, 한예종 설립, 국립중앙도서관의 문화부 이관, 한국예술공방촌 설립 등 황야에 문화의집 네 기둥을 세우고 2년 만에 홀연히 문화부를 떠났다...
민족의 상상력이 고갈되면 그 나라의 역사는 끝난다며 문화선교사를 자청하셨습니다. 뿌리신 문화의 씨앗이 민들레처럼 퍼져 나가 코리아 르네상스 세기에 진입하고 있어 기쁩니다.
이 장관님의 문화주의 미완성교향곡에 세월이 흐를수록 세계인의 감동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천국에서 모든 근심과 짐은 내려놓으시고 쉬소서!
6, 오명
그는 부총리 때 이어령 장관과 인연을 맺었다.
대전 엑스포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70mm 영화였다고했다.
사실 대전 엑스포가 우리나라 청년들에게 가장 감명을 준 것은 화려한 조형물보다도 이 영화였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교수님께서 만들었다.
바르셀로나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가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는 중간중간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 장면이 흘러가면서 우리나라의 발전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한 영화였다.
황영조 선수가 땀방울 하나하나까지 영롱하게 빚어면서올림픽에서 우승하는벅찬 영화였다...
특이한 건축물을 실현하기 위해, 짧은 공사 기간을 극복하기 위해 최신의 공법과 기술이 무수히 동원됐다.
실내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무주 공법, 경사진 외관을 위한 경사 기둥 공법 등 첨단 공법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그 안에 전시하기로 한 것이 바로 백남준 씨의 작품이었다.
이것은 여행 교수께서 강력하게 주장하신 거다.
세계적인 아티스트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선 백남준의 작품에 대해 아는 사람도 드문 시절이었다.
이어령 교수가 아니었다면 우리나라의 보배를 우리가 알 수 있는 기회가 더 멀어졌을 것이다.
6, 이근배
예술원 원장인 그는 "선뜻 내게 주신 '어느 일몰의 시각엔가'"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 해가 1958년이었는데 이미 이어령 선생은 평론가로 등단도 하기 전인 1956년 5월 6일자 한국일보 2면 전면에 '우상의 파괴'라는 김동리 이무영 조향 등 당시 기승문단의 높은 장벽에 화살을 쏘는 폭탄적 선언으로,
문단뿐 아니라 문학을 지망하는 청소년 대학생은 물론 사상계 현대문학 등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지성에 목마른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우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1965년 현대문학 3월호에 발표된 남정현의 '분지'가 북한 노동당 기관지에 전제되자 중앙정보부는 즉각 남정현 작가를 구속하고 반미 사상을 고체하기 위해 북한과 내통하여 위장 발표한 것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엄혹했던 반공법의 거미줄에 걸린 허약한 잠자리를 구출할 손길은 좀처럼 나서지 않고 있었다.
이어령 선생은 대학 교수와 언론사의 논설위원 등 자리와 글쓰기에 대한 불이익이 다가올 것을 감내하며 법정에서 "장미나무의 뿌리가 파이프가 되어 신사의 입에 몰렸다고 해서, 그것이 왜 장미나무의 죄가 되는가?" 하는 적확한 비유로 작가의 무고함을 변호했다.
남정현 선생은 나의 중학교 선배로 이어령 선생과는 동갑내기였고 두해 전 타계할 때까지 선생에 대한 속 깊은 은혜를 토로하는 것을 나는 옆에서 볼 수 있었다...
문학사상 창간 30주년에도, 그리고 창간 600호에도 축시를 쓰고 선생님 영결식에서도 헌시를 읽는 일 등은 모두 선생께서 나를 시키신 것임을 나는 깊이 새기고 있다.
어찌 선생이 천방지축의 나 손잡아 이끌어주신 크신 사랑이며 높은 가르침을 다 보여줄 수 있으랴.
너무 늦었지만, 꼭 한 말씀 "선생님 너무너무 고마웠습니다. 사랑하고 사랑합니다."
올리며 서툰 붓을 놓는다.
8, 이우환
세계적 화가의 추모글은 '굴렁쇠 일화 두 편'이 제목.
80년대 중반 구름 낀 어느 날 인사동 뒷골목 식당에서 이어령 선생님과 점심을 같이 했다.
식당 밖으로 나오는데 아이 둘이 굴렁쇠 놀이를 하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이어령 선생이 손으로 가리키며 "굴렁쇠가 작아졌지만 지금도 있네 그려"했다.
옛날에 없어졌다고 여겼는데 그것이 눈 앞에 있었다.
나도 신기해서 "기리코의 그림같네요" 했다.
어두운 도시의 길 모퉁이에서 어린 소녀가 정적 속에 외로이 굴렁쇠를 굴리는 기리코의 그림이 떠올랐다...
그런 후 몇 년이 흘렀다. 올림픽 한해 전이었던 것 같다.
가을 어느 날 이어령 선생을 만났더니, "이 선생 왜 언젠고 우리가 기리코 그림 같은 광경 봤지?" 한다.
"아, 굴렁쇠?"
"그거, 그거."
"그게 왜요?"
그러자 이어령 선생은 흥분된 어조로 "올림픽 개막식 때 소년이 굴렁쇠 굴리는 아이디어 어때?" 했다.
듣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고, "굿 아이디!" 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가 실행되기까지는 많은 애로가 있었다.
훗날 나는 올림픽 위원장 박세직 씨로부터 애를 먹었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다.
시대 착오라느니 화해하지 못하다느니 왜소하다느니 쓸쓸하다느니 여기저기서 끈질기게 반대론이 쏟아졌다고.
이 안이 채택되는 데는 많은 힘이 모여야 했다.
조직위원회 내부에는 찬성자도 많았지만 시끄러운 주변을 고르는 데는 여러 인맥을 가진 백남준 씨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이어령 선생과 백남씨와 내가 한동안 한 덩이가 되어 쏘다닐 때였다...
수많은 관중의 눈이 집중하는 드넓은 대낮의 경기장에 싱그러운 어린 소년에 의해 꿈 같은 장면이 터트려진다.
이것은 어떤 군상도 범할 수 없는 순고한 순간이고 세기의 경이다.
이것은 한 소년이기에 경기장 전체의 마음이고 힘이며 인류를 가슴 뛰게 하는 하염없는 퍼포먼스가 될 것이다.
수만 명의 관중이 둘러싼 텅빈 경기장에 운동모를 쓴 앳된 소년이 나타났다.
일순 숨 막히는 정적이 공간을 휩쌌다.
그러고는 거대한 기계 소리인지 미지의 벌레 소리 같은 높은 음향이 울리며 이어졌다.
이 정적의 울림 같은 불가사이한 소리의 공간에서 소년은 반짝이는 굴렁쇠를 굴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후 와~ 하고 군중의 환호가 터졌다.
경기장의 꿈만 같은 광경을 목격하고 있으려니 나도 머리 눈물이 쏟아졌다.
마음속으로 이어령 선생의 이름을 수없이 불렀다.
9, 장사익
사익 형의 글은 '정월 대보름 날이 오면'이 제목이다.
그날은 마침 정월 대보름달이었다.
휘영청 둥근 보름달이 환했다.
정오 무렵에 받은 전화로 내 마음은 온종일 설레고 싱숭생숭했다.
정오 쯤 사모님으로부터 "내가 가면 장사익 선생이 내 영전에서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하라고 하시네요"라는 전화를 받았다.
뜻밖의 전화였지만 실은 오래 염원해온 나의 소망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선생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선생님 앞에서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온 터였다.
그 마음이 간절했던지 밤에 그런 꿈을 꾼 적도 있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2000년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가는 시각, 서울시청 앞에서 펼쳐진 행사에서였다.
당시 새천년 준비위원회 위원장이셨던 선생님께서 새 천년 축제를 준비하시면서 나를 초청하신 것이다.
그때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크레인을 타고 올라가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이후 여러 문화 행사에서 자주 마주쳤고 선생님은 내가 노래 부를 때마다 가장 먼저 앙코르를 요청하시며 격려해주시곤 했다.
정월 대보름날 밤 오로지 선생님 한 분을 위하여 노래를 부른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둥둥거렸다.
그러나 막상 너무 마른 선생님을 뵈니 목이 했다.
선생님의 손을 잡고 부른 나의 첫 노래는 비 내리는 고모령이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는..."이라는 가사처럼 우리는 모두 언젠가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선 사람들이다.
그 다음에는 반주를 잘못 하는 바람에 생각지 않았던 노래 '뜨거운 침묵' 이 불쑥 튀어나왔다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 하필이면 왜 당신이었나. 미워서도 아니고 잘라서도 아니다. 너무나 너무나 벅찬 당신이기에 말없이 돌아서서 돌아서 가련다."
부르고 보니 마치 선생님께서 사모님에게 바치는 고백 같았다.
그리고 '낙화유수' 등을 불렀는데 20분쯤 흘렀을까.
선생님이 피곤하실 것 같아 노래를 멈추고 달 구경을 시켜드리려고 창가로 모시려 했으나 거실 창문으로는 높이 뜬 달이 보이지 않았다.
'달도 못 보시고 돌아가시겠구나' 애가 달았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로부터 2주 후에 돌아가셨으니 결국 보름달을 못 보고 가신 것이 못내 애잔하다...
선생님은 생전에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실천하고 가셨다.
"태어날 때는 나 혼자 울고 모든 사람이 웃었으나 죽을 때는 모든 사람이 울고 나 혼자 웃을 수 있도록 사는 게 인간의 최대의 가치야."
10, 한정희
소설가인 그는 '시시포스의 반복'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가둔 2021년 11월 1일이었다.
선생님께서 집으로 오라고 연락하셨는데 그날이 1년에 두세 번 선생님을 모시자고 저자는 사람이 33년째 마련해왔던 모임의 마지막 자리가 된 것이다.
그날 선생님은 너희들을 만나려고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고 침대 안에 소파에 앉아 있으니 기분이 아주 좋다 하시면서,
너희들 주려고 준비한 거라며 젊었을 때부터 좋아하셨다는 카스텔라와 '미루꾸' 캐러멜, 초콜릿을 담은 쇼핑백을 가리켜셨다.
6개월 전 스승의 날에 뵈었을 때보다 너무 많이 수척해진 선생님을 만난 우리의 마음은 무겁고 분위기는 자주 가라앉았지만,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감사 인사를 했다.
선생님께서는 아직 서점에 배포되지 않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 앙상하게 뼈만 남은 손으로 직접 서명해 주시면서, 그 짧은 순간에도 가냘프지만 밝은 음색으로 우리 모두에게 일일이 맞춤 당부를 하셨다.
나에게는 "너는 대학재학 시절 썼던 작품들이 너의 본질이다. 어떻게든 재조명이 될 수 있도록 하고 현실과 내면의 세계가 부딪히며 내는 지독한 아이러니를 소설로 써봐. 네가 재학 중에 썼던 중편 '너마저도' 같은 소설은 정말 좋은 작품이야. 주인공이 마지막에 자신을 향하여 너마저도, 하고 탄식하는 장면이 얼마나 가슴을 울렸는지 알아? 좋은 작품 쓰려고 힘 주지 말고 써. 대표작은 딱 한 편이다. 그러니 겁 먹지 말고 덤벼."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격려가 분명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말씀을 마치시고는 다 함께 사진을 찍자 하시며 무거운 분위기를 깨뜨리셨고, 선생님 병환 쪽으로 화제가 흐르자 카디건 앞자락을 앞으로 쭉 당기시며 "이거 봐. 이렇게 옷이 커졌잖니. 영락없이 '굶주림'(크누트 함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같잖아."
이렇게 가벼운 톤으로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다른 아무 말도 못하고 "아, 그러셨군요..." 맥없이 낮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10,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은 '이어령 선생님과 보낸 시간들'이 제목이다.
중학교 때인 1963년 즈음 '흙속에 저 바람 속에'를 읽고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되었다.
구습과 고정관념을 깨는 책이어서 당시 반향을 일으켰다.
선친과는 1965년 중앙일보 창간부터 논설위원으로 합류해 교유하셨다.
나도 자연스럽게 선생님이 중앙일보에 쓴 '분수대칼럼'을 애독했다.
늘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가 직접 모실 계기가 운명처럼 찾아왔다.
1999~2000년 개인적으로 고초를 겪고 나서 중앙일보의 어른이 계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려워하고, 자문도 받고, 신문 제작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분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모셔온 분이 이어령 선생님과 이홍구 전 총리님이었다. 큰 영광이자 행운이었다.
가슴에 담고 있는 말 가운데 하나가 "사치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치가 사람 사치"라는 것이다.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을 모셔서 큰 사치를 누린 셈이었다.
중앙일보에서 선생님을 2001년부터 2015년까지 15년 모셨다.
중앙일보가 주최한 '한-중-일 30인회'도 선생님 제안으로 2006년에 시작했다.
내가 스기다 료키 일본 니케이신문 사장을 설득하고, 중국 신화사도 참여하기로 하자 당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시던 선생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중일 30인회는 3국 간 갈등으로 고비도 있었지만 2006년부터 2016년까지 11회를 이어갔다.
이어령 선생님과 청담 스님, 내 인생의 참 스승들이시다.
선생님이 지금이라도 '내 방에 오라'고 부르실 것만 같다.
그러면 뒷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한걸음에 내달려 가서 빌 텐데...
이어령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11, 홍신자
무용가인 그의 글 제목은 '팔십이 넘으면 모두 용서가 된다'다.
사람들은 제게 묻습니다.
"춤이란 무엇일까요?" 라고
제게는 스승이기도한 명상가 오쇼 라즈니시는 '마음으로 가는 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춤이란 생동하는 것으로 존재에 훨씬 가깝고, 숲에서 노래하는 새와 소나무들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에 훨씬 가까우며, 내리는 구름이나 자라나는 풀에 훨씬 가깝다."
이어령 선생님은 '너와 나의 거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춤은 세대의 율동을 상징하는 것이며, 세대의 감정을 그대로 고백하는 육체의 언어다."
춤은 의미하는 바가 많습니다.
라즈니시의 말씀처럼 춤은 존재 바람 구름 풀이기도 하고,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처럼 춤은 율동이기도 하거니와 육체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세월은 갔고, 저는 어느 날 이어령 선생님께서 대중을 상대로 강연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 강연장을 찾아갔습니다.
세 번째 인연인 셈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무척 반겨주셨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선생님은 늘 동안이라고 여겼는데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선생님의 강연은 여전히 위력이 대단했습니다.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해주셨지만, 이어령이라는 지성의 숲에서 들려온 핵심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나이 80세가 넘으면 무슨 일을 해도 다 용서가 된다"라는 말.
80세를 넘어 황혼의 길을 걷고 계신 선생님의 말씀은 저의 가슴을 쳤습니다.
선생님께서도 80세를 훌쩍 넘으셨고 저 또한 나이 80세를 넘었던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80세가 넘으면 자유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선생님 말씀은 80세가 넘으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하라는 말씀으로 들려왔습니다.
깊은 깨달음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12, 황주리
화가인 그는 '시인 이어령 선생님을 추억하며' 제목이다.
작년 이맘 때, 나는 노들섬을 혼자 걷고 있었다.
백년다리에 선생님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가진 것이 많고 혼자라도 외롭지 않은 것이니 내가 지닌 생명이다. 걱정 마라, 주먹을 지면 힘이! 손을 펴면 사랑이! 세상은 내 손 안에 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서 스마트폰을 켜고 선생님 번호를 찾았다.
오랜만에 어느 자리에서 만나 번호를 갖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문자를 보냈다.
"노들섬에서 선생님을 만나 너무 좋았습니다."
그냥 보낸 문자인데도 뜻밖에도 답 메시지가 도착했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내 삶을 격려해 주시는 문자였다.
지금 찾아보니 2021년 11월 7일 일요일 저녁 9시 10분이었다.
석 달쯤 뒤에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갑자기 파노라마처럼 선생님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처음 뵌 건 1977년 이화여자대학 미술대학 2학년 때였다.
억울하게 흘러간 누구나의 청춘처럼 흘러간 시간들이 시시한 꿈처럼 남아 있다.
학교 밖에서는 데모들을 하느라 최루탄 연기에 늘 익숙하던 날들, 그 시절 자유로운 영혼이던 나는 미술대학이 미술과 가장 거리가 먼 곳이라는 걸 알았다.
끝없이 비예술적인 줄 한 말들과 영혼이 아닌 손으로 예술을 가르치는 실망스러운 교수님들에 식상한 나는 수업에는 안 들어가고 주로 학교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시절 나는 선생님의 글들을 대부분 독파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오래된 노트에 적어둔 이런 구절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나를 시인이라고 불러다오. 일년 열두 달 한숨밖에는 쉰 적이 없지만 언젠가는 꼭 불러다오."
"우리가 욕심 내는 그 시인의 모습은 밀실과 광장을 동시에 살고 있는 시인이며 글을 쓰며 동시에 말하는 사람이며 앉아 있는 것과 서 있는 것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그런 시인이다."
그의 빛나는 말들은 적절한 곳에 박혀서 빛을 발하는 버섯 같은 것이었다.
그중에 "창문은 언제나 닫아두어야 하는 벽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선생님은 창문이 많은 사람, 그리고 그 창문을 활짝 열줄 아는 분이었다.
자유자재로 그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고 그 창을 통해 보이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려고 노력하는 분이었다.
늘 닫아두는 벽의 기능을 하는 창문을 지닌 사람들이 지난 시대뿐 아니라 오늘까지도 수두룩하지 않은가?
...그가 꿈꾼 문화열차는 바로 꿈의 투구를 현실의 무대로 옮겨놓은 소중한 시도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의 시작으로 우리 문화가 세계에 빛을 발하는 그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누구의 잔치에도 초대받지 않으리라, 높이 세운 칼라에 풀을 빳빳하게 먹이지는 않을 것이며 흑색 턱시도를 입지 않을 것이다... 초대받은 손님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잔치가 끝나고 다들 떠나가고 난 뒤, 비를 들고 청소부 차림으로 나타나리라."
선생님 말씀 중 이런 구절 또한 생생하다.
"진짜 성공은 영원히 성공할 수 있는 목표를 향해 끝없이 가는 것이다. 끝없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성공자이고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다."
...문득 딱 내 마음 같은 이런 식의 구절을 떠올린다.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 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유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하느님."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중에서.
#뱀발...나중에
얼마 전, 만난 소설가 이인화도 인상적인 내용들이 있지만 다음 기회로 돌린다.
하마다 요라는 말년의 이어령과 공동 프로젝트까지 한 일본 젊은 교수 글도 역시 나중에 소개할 기회가 있을 거다.
이어령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문화예술인들이 K-칼처를 더욱 활짝 꽃 피우기를.
또한 캄캄한 종말이 닥쳐오는 듯한 인류에게 문화예술 세례의 축복을 환히 밝히기를...
너무 길긴 하지만...끊어 읽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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